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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찰 기록

왜 어떤 사람은 평온보다 상처를 더 그리워할까 <블랙박스>

살다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던 인생을

겨우 추스르고 따뜻한 일상을 만들었으면서,

느닷없이 제 발로 옛날의 그 지옥 같은 진흙탕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사람 말이다.

 

소설 《블랙박스》 속 여주인공 '일라나'가 딱 그런 인물이다.

 

어두운 복도 끝 밝은 공간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여성의 실루엣이 평온과 익숙한 상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심리를 상징하는 이미지

 

평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두 번째 남편 미하엘과의 삶은

일라나에게 과분할 만큼 따뜻한 안식처였다.

 

가난하긴 했지만, 미하엘은 지극히 성실했고,

일라나를 온 마음으로 아끼고 떠받들었다.

 

전남편 기드온에게

살이 뜯기는 듯한 상처를 받고 쫓겨났던 일라나에게,

미하엘의 식탁은 영혼을 치료해 주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하지만 일라나는

그 평온한 식탁 위에서 서서히 질식해 간다.

 

그녀는 아들의 합의금을 구한다는 핑계로

전남편 기드온에게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단순히 돈만 요구하고 끝내면 될 일을,

일라나는 구태여 선을 넘는다.

 

편지 속에 옛 부부 침실의 내밀한 기억,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며

부딪혔던 순간들을 꺼내어

시시콜콜 적어 보낸 것이다.

 

편지 속에서 일라나는 악을 쓰듯 말한다.

"나 지금 행복하니까 내 삶을 방해하지 마."

 

참 모순적이다.

 

진짜 행복하고 평온한 사람은

굳이 전남편에게

"나 지금 엄청나게 행복하다"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방해받기 싫다면

연락을 끊으면 그만이다.

 

방해하지 말라면서

끊임없이 편지봉투에 풀칠해 대는 행동 속에서,

그녀의 비틀린 속내가 툭 불거져 나온다.

 

그녀는

미하엘과 마주 앉은 평온한 식탁보다,

기드온과 서로를 찢어발기며 싸우던 그 침실이

더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고통이 더 익숙한 사람들

어떤 사람은 평온 속에서는

자기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일라나에게 미하엘의 다정한 눈빛은

고맙지만 지루한 휴식이었을 뿐,

그녀의 영혼을 진짜 흔든 건

기드온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비록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살이 베일지언정,

그 지독한 통증만이

그녀에게는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주었던 셈이다.

 

결국 일라나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전남편의 병간호를 하겠다며

미련 없이 가방을 싼다.

 

그 과정에서 두 번째 남편을 배신하고,

하나뿐인 어린 딸마저 빼앗긴다.

 

남들이 보기엔 미련하고 비극적인 파멸이지만,

일라나는 기어코

기드온의 차가운 침대 곁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다.

 

평온함이라는 낯선 행복 대신,

제 손으로 뼈를 깎는 익숙한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선택의 끝에 남겨진 서늘함

소설의 마지막,

두 번째 남편 미하엘은

그녀에게 짧은 성경 구절 하나를 남긴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대적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행을 그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신다."

 

자비로운 용서처럼 들리는

이 차가운 글귀를 받아 들었을 때,

일라나는 비로소 알았을까.

 

이제 그녀의 곁에는

자신을 아껴주던 다정한 남편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가 그토록 갈구하며 돌아갔던 기드온마저

곧 싸늘한 시신이 되어 떠나갈 것이다.

 

일라나 역시 딸을 잃어가면서까지

고통을 자처한 자신의 선택이

숭고한 사랑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끝내 기드온을 선택했다.

하지만 정말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평온을 견디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을까.

 

일라나는 정말 고통을 선택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오래 지속될 행복을 끝내 믿지 못했던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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