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다〉를 보다 보면,
마음을 툭 건드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어릴 적 딸을 매정하게 두고 떠났던
대배우 오정희(배종옥 분).
그녀가 사석에서
제3자에게 제 딸 이야기를 툭 던지는 순간이다.
보통의 엄마들이라면
미안함에 눈물을 훔치거나 핑계를 댔을 텐데,
오정희는 전혀 다른 단어를 꺼낸다.
"내 친딸. 너따위랑은 비교도 안되게 근사해."
착하다도 아니고,
예쁘다도 아니고,
심지어 멋지다도 아니다.
왜 하필 '근사(近似)하다'였을까?
이 낯선 단어 하나에
오정희라는 인간의 지독한 모순이 서려 있다.

지옥에서 도망친 생존자, 지옥을 물려준 가해자
세상은 오정희를 향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멀어
자식을 버린 비정한 악녀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건
화려한 스타의 삶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비참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오정희는 화려함을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정희가 원한 것은 탈출이었다.
연기할 때만큼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었기에,
그녀는 고백한다.
"나무여도 좋으니, 제발 오정희만 아니면 됐다"고.
그녀에게 연기는
예술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오정희는
그 지옥에서 탈출한 생존자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도망치기 위해
가장 취약한 자식을
그 지옥에 홀로 남겨두고 온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생존과 가해를 동시에 저지른 모순 덩어리다.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서늘한 '거리두기'
오정희는
자신의 바닥과 이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딸에게
눈물 어린 사죄를 하며 다가가는 대신,
서늘한 거리를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 넌 내 손에 크지 않은게 다행이야. 잘 컸어 "
이 대사는 딸을 향한 뻔뻔한 변명일까,
아니면 비참한 자기 객관화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대면할 용기가 없기에,
"나랑 안 커서 다행"이라는 말로
슬쩍 자신을 방어한다.
그 서늘한 거리감 끝에서
오정희는 딸을 향해 '근사하다'는 단어를 뱉는다.
대상을
내 품에 밀착시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나 쓸 수 있는 단어.
감히 미안하다고 말할 염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사람.
그래서였을까.
오정희는 끝내
"근사하다"는 말을 골랐다.
우리 안의 오정희를 바라보며
오정희라는 인간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자식을 버린 대가로
제 인생을 찬란하게 증명해 낸 여자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녀는 매정한 가해자이지만,
그 내면의 도망치고 싶었던 공포만큼은
서글프도록 인간적이다.
이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얼굴이
오정희라는 한 인간 안에 그대로 공존한다.
자식을 지우고 나를 살릴 것인가,
나를 지우고 자식을 살릴 것인가.
오정희는 끝내
"미안하다"보다
"근사하다"를 선택했다.
사람은 정말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가장 솔직한 단어를 고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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